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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논개의 사연은 삭제돼야 한다
등록자 고병훈 등록일 2000.12.31
"논개의 사연은 삭제 돼야 합니다" 진주성 촉석루 의기사 앞의「의랑 논개의 비」는 1954년 10월 29일 의기창열회에서 세웠다. 그리고 이 비의 후면에는 아래와 같은 논개의 사연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의랑 논개가 나신 곳은 전라북도 장수군 내게면 대곡 주촌리이니 성은 주씨이다. * 장수군 장수면 북쪽의 큰 길가에 있는 논개 비각은 장수현감 정주석 이 세운 비석을 미일 전쟁 때에 일본 경찰이 땅에 묻었던 것인데, 을유년 팔월 해방 뒤에 장수군민의 힘으로 파서 모신 것이다. * 선조 이십육년 계사 유월에 육만 대병이 아연 진주성을 세겹으로 둘 러 싸니… * 날이 새매 적들의 만흥은 더욱 도도하여 촉석루 위에 버러진 잔치가 한창 난만할 뿐이다. 이 때 다락 밑 강 언덕의 외딴 넙적바우 위에서 는 한 사람의 꽃다운 여인이 홀로 춤추며 노래하고 있다. 만취한 적장모곡촌(毛谷村) - 일설 석종로(石宗老) -이 달려 내려 가더니, 여인과 더불어 얼싸안고 환장처럼 즐기는 것이었다. 마침내 여인은 적장을 껴안고 떨어지고 만다.… 이 분이 곧 의기 논개이다. 그런데 이 비를 건립한 당시는 6.25 전쟁이 있은지 불과 4년 밖에 되지 않은 어려운 시기였고, 촉석루도 소실되어 이의 중건이 당면한 문제였는데(2년 후인 1956년에 착공하여 '60년에 준공), 이러한 시점 에서 이 비를 왜 건립해야만 했던가. 더욱이 의기사도 중수한지가 오래되어(의기사는 소실되지 않음), 이의 중건도 시급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의기사는 1955년에 착공하여 '56년 에 준공하였다. 이와 같이 촉석루와 의기사의 중건도 당면한 문제였는데, 이 모두의 앞선 시기에 이 비를 왜 건립해야만 했던가. 그리고 이의 건립경비는 어떻게 마련했을까 라는 의문도 생긴다.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흑막이 내재하고 있다. 1. 이 비를 건립하기 전인 1954년 4월 1일 장수에서는 의암주논개 사적 보존기성회를 조직하고, 10월 19일에는 장수읍 남산에「논개영정각 (의암사)」을 착공하여, 1955년 10월 3일에 준공하였다. 그리고 여기 에는「의암주논개 영정각 신축기」를 현판해 두었는데, 여기에서 논개 를 처음으로 주논개라고 기록하고 있다. 2. 1960년 12월 김상근 장수교육감은「의암주논개랑 생장지사적불망비」 를 세웠는데, 이 비문에서 논개의 관향을 처음으로 신안(新安)이라 하고 주촌(朱村)에서 주달문의 딸로 태어났다고 주장하였다. 3. 1997년 장수문화원에서 발행한『논개의 생애와 충절』및『논개실기』 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논개가 순국한 진주지역의 사람들에 의해 그녀의 출생지를 밝힌 최초 의 글로 의의가 있다." 그 "기록은 장수지역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4. 오늘 날 장수군에 의해 논개의 성이 주씨가 되고, 주촌에서 출생했다는 주장은 이 비문에 근거한 것이다. 5. 1999년 3월 15일 김범수 소장이 김상두 장수군수에게 논개의 성이 주씨 라는 것과 주촌에서 출생하였다는 사료적 근거를 질의하였더니, 장수군 수는 "1956년 진주에 세워진「의랑 논개의 비」에서 확실히 하고 있다" 고 하였다. 6. 일본경찰이 땅에 묻었다는 논개비각(촉석의기 논개생장향수명비)에 대하 여도, 장수문화원 발행의『논개의 생애와 충절』및『논개실기』에는 마을 청년들이 묻었다고 하였다. 7. "계사 유월에 6만 왜병"이라고 하였으나, 10만 병력이 통설이다. 8. "촉석루 위에 버러진 잔치"를 말하고 있으나, 진주성이 함락되는 와중에 촉석루는 소실되고 없었다. 9. 1914년 일본 동경에서 발행된『가등청정전』에 의하면, 모곡촌육조(毛谷村 六助:게야무라 로꾸스케)는 임진년 7월 가등청정을 따라 함경도에 출진 중 올량함(兀良 :오랑캐)에 의하여 전사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곡촌육조는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제2차 진주성 전투에는 참 가하지도 않은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논개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 등을 살피더라도 진주성의 역사와 논개의 역사를 왜곡한 의랑 논개의 비 후면에 기록된 논개의 사연은 반드시 삭제돼야 할 것입니다. 2000. 12. 29.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 고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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